5 사리셀카에서의 하루, 사리셀카
4 시간의 낮
사리셀카를 비롯한 핀란드 북부 라플랜드 지방에는 백야와 극야라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백야는 낮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현상으로 여름에 발생하고, 극야는 밤이 하루종일 계속되는 현상으로 겨울에 발생합니다. 제가 사리셀카에 방문한 11월 말은 아직 극야가 시작된 시기는 아니었지만 극야까지 2주 정도 남은 시기였기에, 해가 약 10시 정도에 떠서 2시가 되기 전에 해가 지곤 했습니다. 해가 떠있는 시간은 기껏 해야 4시간도 되지 않았기에, 사리셀카에 머무르는 동안 낮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12시간이 넘는 밤 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사리셀카의 아침은 조금은 느지막하게 시작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많은 관광객들이 오로라를 보기 위해 늦게 잠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4시간도 안 되는 소중한 낮을 낭비할 수는 없기에 저는 7시 30분 정도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갑니다. 아침을 먹고 해가 뜨기 직전 시간인 9시 30분에 호텔을 떠나 사리셀카 마을에 내려갈 준비를 합니다. 해가 뜨는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서지만, 어스름이 시작되는 시간은 은근히 빨라 9시 30분 정도가 되니 이미 충분히 밝습니다. 다운타운까지는 걸어서 30분이 걸립니다. 다운타운이라고 해서 볼 게 많은 건 아닙니다. 끽해야 기념품 상점과 슈퍼마켓 정도입니다.
예전 캐나다에서 살 때는 한겨울에도 낮 시간이 최소 8시간은 넘었는데, 그 때는 해가 5시 정도에 지곤 했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는 오후 4시 30분 정도에 학교 근처 슈퍼마켓에 가보면 학생, 교직원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술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래도 밤이 긴 나라에 살다 보면, 그것도 한국처럼 밤문화가 가득한 번화가가 아닌 시골에서 살다 보면 결국 하루의 마무리는 음주로 하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리셀카의 K마켓에서 나온 제 손에는 갖가지의 술들이 들려있습니다. 핀란드 맥주. 롱 드링크. 와인. 지난밤에는 술을 사러 나갈 수 없어 호텔의 미니바를 이용했는데 그 금액도 만만치 않았기에, 오늘 밤부터는 미리 준비하는 겁니다. 장을 보고, 기념품을 몇 개 들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부릅니다. 제가 머무는 호텔은 산 꼭대기에 있기에 내려오는 건 가능하지만 올라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두 손 가득 담긴 갖가지 물건들과 함께 말입니다.
호텔에 돌아오니 정오가 되어 있습니다. 해가 지는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다시 호텔을 떠나, 이번엔 스키장 정상에 있는 식당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있는 사리셀카 조형물에서 사진도 찍고 스노우 엔젤도 만들어봅니다. 스키장 정상에 있는 기념품점에는 사리셀카 마을 중심에 있는 기념품점보다 조금 더 로컬 느낌이 물씬 나는 기념품들이 있습니다. 어젯밤, 호텔로 라이드를 해주신 기사분이 말하신 세계에서 최고로 맛있는 연어수프를 먹으로 식당으로 향합니다. 연어 수프를 한입 뜨자 왜 기사님이 이 연어수프가 세계 최고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전에도 이후로도 연어수프를 계속 먹어봤는데, 이곳에서 먹은 연어 수프가 가장 맛있었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해가 질 시간이 가까워져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돌아다녔더니 사우나가 간절합니다. 그렇게 한 1시간 정도 핀란드 사우나를 즐기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습니다. 나오자 마자 자몽맛 롱드링크 한 캔을 벌컥벌컥 비웁니다. 음주 후에 사우나를 가지 말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사우나 후에 음주를 하지 말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우나 후에 음주를 하니 흘린 땀만큼 수분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몸이 알코올까지 쭉쭉 빨아들이는 느낌입니다. 한 캔을 다 비우고, 또 다른 한 캔을 딴 후에 집에서 가져온 보드게임을 꺼냅니다.
한두 시간 보드게임으로 놀고 나니 오후 5시. 배가 출출합니다. 집에서 가져온 햇반과 라면을 꺼냅니다. 많은 나라에서 육류가 들어간 라면 반입을 허용하지 않아 이번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육류가 들어가지 않은 라면을 시도해 봅니다. 육류가 들어갔던 들어가지 않았든 간에 추운 날씨에 먹는 라면은 언제나 옳습니다. 같이 가져간 김치 통조림과 후리가케까지 야무지게 뿌려 라면 한 봉지와 햇반 하나를 단숨에 비웁니다. 핀란드에 왔으니 역시 양치 후에는 핀란드에서 산 자일리톨 껌을 씹어줍니다. 밥을 다 먹고 차를 마시고 설거지를 다 하니 오후 6시 30분. 아직 오로라가 나오기에는 이른 시간입니다. 넷플릭스를 켜고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틀었습니다. 함께 여행하는 일행이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는 데다, 핀란드 여행을 마친 후에 파리로 이동할 생각이니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오후 8시 30분에는 슬슬 액티비티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오후 9시에는 스노모빌에 달린 썰매를 타고 고아티라는 텐트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고아티에 도착해 불을 피우고 주전자를 올려 핫초코를 마실 물을 끓입니다. 함께 간 다른 여행자들과 가이드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쉽게도 오늘은 날씨 때문에 오로라가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썰매를 타고 몇 번 눈 속에 걸린 썰매를 밀기도 하며 호텔로 돌아오니 11시가 넘은 시간입니다. 캠프파이어를 했다지만, 오랜 시간 밖에 있었더니 몸을 녹이고 싶어 다시 핀란드 사우나로 들어갑니다
오후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나름대로 바빴던 하루 일정과 시차 탓에 졸음이 몰려옵니다. 오로라 예보를 봐도, 날씨 예보를 봐도 오늘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새벽 2시까지 기다려보지만 날씨는 나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사리셀카에 머무르는 시간은 단 4일. 오늘은 2일 차. 라플랜드 지방에서 3번째 밤이지만 아직 오로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라플랜드 지방을 떠나기 전 오로라를 꼭 봐야 하는데 하는 마음과 함께 새벽 2시 30분이 넘어 잠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