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누가 그랬다, 영국항공은 타지 말라고, 런던
나라면 안타
십 년도 더 전에, 꽤 오랜 기간 영어회화학원을 다녔습니다. 오래 다닌 만큼 새롭게 오는 원어민 선생님도, 떠나는 원어민 선생님도 많이 마주쳤습니다. 그중 기억나는 한 원어민 선생님이 계십니다. 영국에서 오신, 영국 발음의 원어민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이전에 영국항공 승무원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 않았을 때라 영국항공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영국 항공은 어떻냐고 물어봤는데, 선생님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나라면 안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영국항공에 탈 기회가 생겼습니다. 비행기를 참 많이 탔음에도 지금까지 영국항공을 타지 않았던 건, 어쩌면 저 기억 저편에 남은 그때 그 선생님의 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승객들이야 그 항공사가 별로였다고 가벼이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전 직원이 그 항공사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결과적으로 영국항공을 이용하게 되었음에도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아시아권 항공사의 서비스 수준이 아닌, 미국 항공사들의 수준보다도 덜하지 않을까 하는 암묵적인 생각만 할 뿐이었습니다.
실체가 없으면서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것.
항상 어렵다고 느끼는 건 바로 선입관을 부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선입관은 여러 경로로 형성됩니다. 가까운 사람의 말 때문일수도,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의 의견 때문일 수도, 적은 수의 경험 때문일 수도, 충분히 경험해보고 난 다음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충분히 경험해보고 난 이후라면 우리가 갖는 의견은 선입관이라고 하지 않고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을 했다면,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결론일 테니 “어떤 대상이나 주제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태도”라는 선입관이라는 단어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경계해야 할 선입관은, 본인이 충분히 경험하지 않고 어떤 대상이나 주제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태도입니다. 선입관이 위험한 이유는,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없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겐 히스로 공항과 영국항공이 이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용해본 히스로 공항은 나쁘지 않았고, 영국항공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히스로 공항과 영국항공에 대해 약간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아있는 걸 보면 선입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깨닫기도 하고요. 영국항공을 이용하던 때는 추수감사절 연휴였습니다. 그래서 특별 기내식으로 크리스마스 칠면조 요리가 나왔습니다. 음식이 별로이기로 유명한 영국의 항공사이지만, 양도 많고 맛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항공사답게, 우유를 넣어 먹는 블랙티도 나쁘지 않았고요. 취항지 수가 어마무시한 항공사답게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 영화도 엄청 많았고요. 지연이나 결항, 수하물 문제없이 안전하게 잘 도착했습니다. 이쯤이면 영국항공에 대한 선입관이 사라질 법도 한데 여전히 영국항공 이용을 피하는 걸 보면 선입관이 무섭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주제가 있는 여행
오로라와 미술관과 크리스마스 마켓을 목표로 했던 여행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목표로 했던 걸 이루기도 했고, 이루지 못했기도 했지만 후회없는 재밌는 여행이었습니다. 새로운 경험치를 쌓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입관과 싸우기도 했고, 또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되기도 했고요.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것의 끝은 또 다른 것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 말답게, 오로라와 미술관과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이 끝나고 반년이 지나 여행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저는 이미 또 다른 여행을 많이 다녀왔습니다.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기도 하고요. 모든 여행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지만, 그럼에도 주제를 딱 정하고 다녀오는 여행은 여러모로 더 즐거운 것 같습니다.